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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탐험

심리 스릴러 <<테라피>> 제바스티안 피체크 / 권혁준

by 열린아이 2025. 4. 3.

읽고, 첫 느낌

2025. 4. 3. (목) 새벽 4시 13분. 나는 방금, 저녁부터 읽기 시작한 <<테라피>>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흐음. 아마 이 느낌의 전부를 글로 표현할 수는 없겠지. 이 책은 내 생각의 한계 경계에 있는 영역을 간질거렸다. 어떻게 이렇게 정신 치료와 잘 엮어서 이야기를 창작했지? 놀랍다. 만약 나에게 정신증이 생긴다면, 의료진에 제바스티안 피체크 당신이 포함되었으면 좋겠다. 심연을 들여다보고, 아주 사려깊고, 섬세하다고 느껴진다. 나도 당신 만큼(정신을 맡길 만큼)의 신뢰와 기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정신적 고통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마음의 탄력을 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다. 아주아주 사려깊고, 섬세하고, 정교하고, 우아하고, 교묘하고, 해박하고, 무해하고, 정직하고, 어둠과 고통을 알면서도 초연한 상냥함을 지녀야겠지.
 
 한 정신과 의사분의 말이 떠오른다.

"어떤 말과 모습으로 위로를 해주는 것이 좋을지는 사람마다 각자 다를 수 있겠으나, 그 과정에 대해 최대한 수용과 긍정을 하는 역할이 되어야겠다는 방침을 가져본다.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독서 동기

 작년 여름 <<소포>>를 읽고 이 작가(제바스티안 피체크)를 좋아하게 되었다. 정신의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심리 묘사가 무척 흥미로웠고, '작가의 말'에 첨부되었던 '사랑스러운 지모네의 편지'가 대단히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여유가 있을 때마다 다른 작품도 하나씩 읽어볼 생각이다. <<영혼파괴자>>, <<노아>>, <<눈알수집가>>, <<조슈아 프로파일>>, <<마지막 카드는 그녀에게>> 등이 대기 중이다.

지모네라는 독자가 <<테라피>>를 읽고 작가에게 보낸 편지


줄거리와 감상

 기대와는 다르게, 의외로 초반 30% 정도는 깊이 몰입하지 못했다. 다른 일이 많아서 정신이 산만했나? 그래도 등장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떠오르는 생각들로 이어나갔고, 에필로그에 가까워져서야 결말에 대한 궁금함으로 빠져들었다.
 

- 줄거리 - 

  1.  어느 날, 유명한 정신과 의사 '빅토르 라렌츠' 박사는 딸 요제핀을 눈 앞에서 잃어버린다. 딸을 찾으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빅토르는 하루아침에 정신증 환자로 낙인찍히고, 세간의 관심을 피해 외딴 섬으로 도피하여 자신을 감금시킨다.
  2.  비바람이 몰아치는 섬의 늦은 밤, '안나 슈피겔'이라는 미스터리한 여작가가 자신의 정신증을 소개하며 찾아온다.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들이 현실에 나타난다고 믿는 증상(망상)'을 앓고 있다며, 특히 '샤를로테'라는 여자 아이가 신경쓰인다고 한다.
  3.  빅토르는 자신의 상황상 상담 요청을 거절하지만, 안나가 털어놓는 샤를로테에 관한 망상의 내용이 딸의 실종 사건과 소름끼치게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 혼란을 느낀다. '안나는 정말 환자인 걸까? 아니면 딸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나? 나는 제정신인가?'
  4.  빅토르는 혼란과 불안, 현실과 환각, 기억과 망상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딸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 조현병(정신분열병)은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능력의 약화를 유발하는 뇌 질환이다. 자료에 따르면 100명 중 1명이 걸릴 정도로 흔하며, 누구나 걸릴 수 있다고 한다.

 - 감상 -

 망상을 다루는 이 책을 읽으며 특별히 빠져들었던 생각은, '뇌에 새겨진 강력한 믿음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가?'였다. 나는 인간 '믿음 체계'의 형성과 변화에 관심이 많다.
 
 이유 하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 존재의 안정을 느끼고 서로 신뢰하며 살아가는 탄력적인 세상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믿음'이라는 필터로 세상을 본다. 때로는 그 믿음이 너무나 강력해서 벗어나기 어려운 프레임이 되기도 한다.
 가령, 반복된 실망 속에서 '인간은 다 똑같다'는 냉소적 믿음을 구축하거나, 폭력을 경험한 이가 '나를 지키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생존 규칙을 단단히 새기는 것처럼 말이다. 개인의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그 강력한 믿음의 회로를 생각하면 안타까움과 함께, 그 변화가 얼마나 어려울지에 대한 질문이 깊어진다.
 
 이유 둘, 공교롭게도 바로 두 달 전인 지난 1-2월, 애정하는 절친에게 정신증(망상, 환각)이 발생하고 진행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면서, 가만히 이야기(헛소리)를 듣는 것 외에 큰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친구가 마음을 열어주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면서도, 그리고 친구 부모님의 말("병철아.. 우리 아들 어쩌면 좋니 ㅠㅠ")을 듣고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뇌에 깊이 새겨진 믿음의 정도는 얼마나 강력할까? 나는 중력을 믿는다. 손에 펜을 쥐었다가 놓으면 펜이 바닥에 떨어지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갖고 있다. 만약 이 정도의 강도로 누군가가 망상을 하고 있다면 그를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기로는, 믿음은 신경망의 연결로 (물리적으로)실재한다. 믿음을 바꾸려면, 기존의 강력한 연결을 새로운 연결로 배선해야 한다. 정신과 의사 노먼 도이지(Norman Doidge)가 신경가소성을 설명한 '썰매 타기 은유'를 생각해보자.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좋은 생각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눈 쌓인 언덕길을 썰매를 타고 내려올 때 마음대로 궤도를 정할 수 있다. 눈길에 숨어 있는 어떤 변화도 감당할 수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언덕길을 내려올 때는 처음에 갔던 썰매 자국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에 웬만하면 그 길을 따라 내려온다. 그다음, 그다음도 마찬가지다. 일단 만들어진 궤도는 정말 빠르게 너무나 쉽게 썰매를 언덕 아래로 유도한다. 따라서 다른 경로를 선택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인위적으로 깨달음(인지적 재구성, 정서적 경험의 재해석)을 유도하려면 정말 무척이나 정교하고 섬세한 (개인화된)상황 연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테라피>> 속 아래의 두 장면에서 나는 이에 관한 울림을 느꼈고, 작가의 심리 묘사가 놀라웠다.

  •  빅토르가 며칠에 걸쳐 안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키우던 강아지(신드바드)의 존재 유무조차 혼란스러워하고, 결국 안나의 말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안나가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마치 빅토르의 무너진 현실 감각을 재구성하려는 고도의 치료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야기가 빅토르의 트라우마와 기묘하게 얽히면서, 빅토르가 기존의 믿음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각(perception)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  샤를로테(안나의 소설(망상) 속 여자아이)가 안나에게 특정 부탁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안나는 샤를로테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기꺼이 행동에 나선다. 나는 여기서 인간 행동의 깊은 동기 중 하나는 누군가에게 기여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샤를로테가 상대방의 이러한 심리를 섬세하게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행동을 이끌어내는 방식이 교묘하면서도 우아하게 느껴졌다.

생각의 파편들

 빅토르가 제한된 정보(기억, 안나의 이야기)만으로 믿음을 구성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이는 이전에 읽었던 도서인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언급된 WYSIATI(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인지적 경향과 맞닿아 있다.
 게다가 챗봇(LLM)이 때때로 맥락과 사실에 어긋나는 '그럴듯한' 답변을 생성하는 할루시네이션 현상과 유사한 메커니즘으로 느껴져, 기술과 인간의 인지 사이의 연결성에 대해 더욱 생각할 거리를 느꼈다.
 
 * WYSIATI(What You See Is All There Is) : 당신에게 보이는 것이 당신 세상의 전부이다.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현재 활성화되어 있거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정보만을 가지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왜곡해서 만들고 결론을 내리는 경향.


 미래에는 아주 사려깊고 천재적인 최고의 정신과 의사가 로봇에 내재되어 보급되겠지(적어도 기술적으로는 가능하게 되겠지). 그럼 저비용으로 누구나 고품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게 되려나? 아니면 인간은 리소스를 들일 만큼 귀중하지 않게 되려나?


 누군가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 들어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어쩌면 정신이 파괴되어가는 사람을 구원하는 행동일지도.


생각나는 도서 : <<제정신이라는 착각>> / 필리프 슈테르처

뇌에서 '확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신경과학적 관점에서 다룬다.


발행일 : 2007. 6. 15.
쪽수 : 379
만족도 : 7 / 10